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공의라

성경은 언제나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전13:13)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예언하는 능력이 있거나,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떤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주님께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구제와 엄청난 희생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유익이 없다고 한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있을 때 열매로 자연스럽게 다가 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열매를 기다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사랑의 열매를 “달려있는 것처럼” 표현하려고 하는 것같다. 오래참아서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온유한 척해서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려고 한다. 악한 것을 혼자 있을 때에는 절제할 수 없을 만큼 저지르지만 사람들앞에서는 악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사랑의 언약을 나타내려고 한다. 마음은 무례한데 겉으로 태연한 척, 거추장스러운 인내의 열매를 억지로 가짐으로 스스로 사랑의 위대한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 처럼 착각한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롬13:8,10)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정의긍휼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마23:23)고 말씀하셨다. 은혜의 시대에 율법을 져버리고 사랑만을 이야기 하다보니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는 율법의 완성과 그 정의와 긍휼은 어느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지는 않는가? 더군다나 잘못된 개념이 가득한 이 시대의 왜곡된 사랑이라는 큰  렌즈에 예수님의 사랑이 굴절되어 우리가 이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랑하기때문에 살인이 가능하고, 사랑하기때문에 집착하고, 사랑하기때문에 굴복시키려하고, 사랑하기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노래가사가 사람들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아닌가?

“모든 사람을 다 용서를 해도 절대로 저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어떤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서 고백을 했었다. “함께 사역을 하면서 이리저리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았고, 그 사람의 이간질 때문에 결국은 담임목사에게도 미움과 오해를 받았다는 것이 참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2년 지난후에 그 사람이 교회를 잠시 방문했었다. 그런데 상처를 준 당사자가 함께 위대한 동역을 이루었다고 오랜만에 찾아온 그 사람을 찾아가봐야 한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가 머무는 숙소로 떠나는 것을 볼때에 등꼴이 오싹한 적이 있었다.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우리의 오랜 쓴뿌리를 감싸는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격정적인 나의 사랑의 노래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불려진들 음치라면 듣는 사람이 얼마나 불편할까? 차라리 사랑이라는 말대신에 정의와 공의로 그 사랑을 대처해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믿은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할찐대 그중에 바탕은 공의라”